역사 속에서 사람 곁에서
'부산돼지국밥 로드'의 식당 30곳은 1938년부터 2018년에 걸쳐 장사를 시작했다.
영도다리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부터 피란수도와 신발산업 중심지를 지나 문화관광 도시에 이르기까지, 부산 역사의 페이지마다 돼지국밥으로 삶을 꾸리고 하루를 위로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귀환 동포피란민 품은
국제시장
신창국밥 서혜자(79) 씨는 오늘도 보리차를 끓인다.
1969년 국제시장에서 탁자 두 개로 국밥집을 시작했을 때부터 아무리 더운 날에도 찬물을 내지 않았다. 시장에 부산 사람보다 이북 사람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순대국밥집 할머니도 그 중 하나였다. 국밥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힘들다고 아서라 하기에 혼자서 배웠다. 큰아들 돼지저금통이 가게 밑천이었다.

서 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 뒤 함께 귀국한 가족들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국제시장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결혼했다. 어린 아이들은 새벽이면 나가고 없는 엄마에게 '엄마 집'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바란 것은 5남매 교육보험 부어서 공부시키는 것뿐이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착하게 커서 지금은 가게를 돕거나 지점을 운영한다. 이제 스물다섯 된 큰손자도 가업을 이어보겠다고 한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 선뜻 가게를 빌려준 집주인, 명절마다 순대를 먹으러 오던 이북 손님들, 동짓날마다 대접하던 팥죽 맛을 기억하던 주위 상인들.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도 아직 지팡이를 짚고 찾아오는 40년 단골이 있다. 그래서 서 씨는 오늘도 주방을 지킨다.
밀양집 정정아(51) 씨는 결혼 2년 만에 상을 치른 시어머니를 지금도 오랜 단골들의 기억 속에서 만난다. 시어머니 설양석 씨는 손큰 사내 대장부 스타일이었다. 부평깡통시장에서 힘들 때 설 씨의 덕을 안 본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한번 온 손님은 절대로 다른 가게에 안 보낸다고 할 만큼 수완도 좋았다. 덕분에 밀양집은 시장 국밥 골목 중에서도 단골이 많았다. 정 씨는 그 때 그 손님들이 "할매 때 맛 그대로"라고 할 때가 제일 뿌듯하다. 그런 날이면 이삼십 년씩 일한 직원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국물 맛을 살핀다.

시아버지 박재쇠(95) 씨의 별명은 '미스터 면도날'이었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전후 원조 계획을 관리하는 미국 측 경제조정관실의 항만 운영 감독관으로 일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님이 있던 일본에서 선교사에게 배운 영어 덕분이었다. 칼 같은 일 처리로 신임도 얻었다.

밀양집은 그가 마흔 넷에 고향 이름 간판으로 시작한 가게다. 막내아들 박이현(54) 씨와 정정아 씨 부부가 2001년부터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박 씨는 아내와 함께 일군 가게를 아들 부부가 유지해주길 바란다. 부부도 그럴 생각이다.
마산 댁의 50년, 거제 댁의 30년
마산식당 김정순(78) 씨는 마산에서 가방 두 개, 밥그릇 네 개, 수저 네 벌들고 부산에 왔다. 남편이 부산에 가면 돈을 더 잘 번다고 했다. 범내골 변전소 고갯길의 월세 3000원 단칸방에서 석 달을 살았다. 아들 둘을 마산 큰집에 맡기고 조방 앞에 식당을 차린 건 1968년이다. 매시장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던 당시 조방 앞은 기사식당 골목이었다. 버스 기사는 안내양 아가씨, 조수 총각까지 3명이 한 조로 왔다. 택시 기사들은 자리가 다 차면 계단이며 국솥 옆에도 앉았다. 제복 차림 기사들이 우르르 다녀가면 앞치마의 돈 주머니가 금세 불룩해졌다.

개인택시 면허가 나온 기사에게는 밥 한 그릇 먹고 가시라 대접도 했다. 그 때 그 기사들은 지금도 손님을 태우고 온다. 김 씨는 키가 작아도 간은 커서 장사가 안 될 때도 단 맛 나는 비싼 고기만 썼다. 매일 그날 치 고기를 대주는 평화식당 식육점 사장은 총각 시절 마산식당에서 약혼식을 했는데 이제는 같이 늙어간다. 각시일 때부터 할매 소리를 들으며 장사한 지 50년. 2대 경영에 나선 아들 남성진(49) 씨 부부가 이제 좀 쉬시라 하지만 김 씨는 변함없이 손님들을 맞고 있다.
88수육 김석순(62) 씨가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터전을 옮긴 건 1980년. 어려운 시절이었다. 남편이 고등어잡이 배 월급 3만 9000원을 받아 3만 원을 주면 그 중 2만 원을 저금하고 1만 원을 생활비로 썼다. 라면은 비싸니까 국수 한 다발에 라면을 하나 섞어서 끓여 나눠먹었다. 입주 간병 일을 하다 수정시장에 가겟방을 얻었고 치킨집에서 국밥집으로 바꿔 연 것은 1989년이다.

당시 수정시장 일대에는 보험회사들이 즐비했고 회사 발행 식권을 들고 오는 부산일보 손님도 많았다. 사람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봄가을이면 수육 단체 주문이 밀려들었다. 장례식장 주문도 쏠쏠했다. 지금은 동네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나란히 있던 국밥집들도 하나씩 문을 닫거나 도매 장사만 하는 집이 많다. 수육에 소주 한잔 걸치는 술 손님도 확 줄었다. 아이들에게 가난을 물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던 30년. 아직도 저렴하고 푸짐하게 주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다.
삼화고무, 보림극장,
그리고 재민이네
할매국밥은 부산 신발산업의 전성기와 침체기를 차례로 지켜봤다. 김영희(65) 씨가 대구에서 부산으로 시집와서 시어머니 고 최순복 씨에게 일당을 받으면서 일을 배울 때만 해도 할매국밥이 있던 교통부 사거리는 인근 신발공장 노동자들로 꽤 북적거렸다. 더 전에 평양 출신 시어머니가 1956년 인근에 처음 식당을 열었을 때는 아침마다 범일동 ‘하꼬방’ 판잣집에서 출근하는 노동자들로 골목길이 꽉 찼다고 했다.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수출 실적 1~2위를 다퉜던 삼화고무의 몰락은 동네 전체를 흔들었다. 범일동 극장 트리오 중에 제일 번성했던 보림극장의 풍경도 바뀌었다. 한때는 톱가수들의 대형 쇼가 열렸고 노동자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던 극장은 실직자들이 새벽 인력시장까지 공치고 나서 시간을 때우는 곳이 됐다.

삼화고무는 1992년, 보림극장은 2007년 문을 닫았다. 시어머니도 2007년 세상을 떠났다. 할매국밥은 그때나 지금이나 맑은 국물에 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돼지국밥을 판다. 배고픈 사람 더 주고 학생에게 더 주던 시어머니 인심도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이름만 남은 보림극장 앞길에는 그 옛날 남진, 나훈아 쇼 관객 대신에 유튜브를 보고 할매국밥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매일같이 줄을 선다.
재민국밥 조재순(67) 부부는 1988년 동래 수안인정시장에서 아들 이름을 붙인 가게를 개업했다. 정작 재민이는 한동안 외갓집에서 부모님과 따로 살았다. 다락방에서 부부 둘이 먹고 자며 장사를 하다가 옥상방을 얻어 아이들을 데려온 건 몇 년 뒤다. 그래도 남편이 1980년 동국제강 노동자투쟁에 참가했다 고초를 겪고 해고됐을 때에 비하면 온가족이 모여살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시장 안에는 한때 돼지국밥 식당이 6곳이었다. 골목은 노점상 리어카와 손님들로 북적였다. 국밥집에는 서민도 부자도 왔다. 부부는 365일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성실하게 장사를 했다. 그렇게 15년 만에 옆 건물을 사서 이사했다. 개업날 손님이 가게를 가득 채웠는데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부부는 건강하게 일하다가 조용하게 물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 몇 년 전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일을 배우고 있는 아들 최재민(42) 씨가 그들 뒤를 이을 것이다.
신도시키즈와 IMF의추억
양산국밥은 막 입주가 시작되던 해운대신시가지에 문을 열었다.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 이웃들은 이 곳에서 얼굴을 텄고, 새 학기 반장이 햄버거 한턱 대신 국밥을 쏘면 한 반 학생들이 단체로 왔다.

김용애(60) 씨는 2002년 월드컵 때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응원전을 마친 청년들이 북소리에 맞춰 "양~산국밥"을 외치며 들어오던 장면이 아직 생생하다. 그 때 그 신도시 키즈들이 이제는 자녀들을 데리고 온다.
경주박가국밥 박주호(64) 씨는 1997년 체인 사업 을 시작했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이어지던 심야영업 단속이 막 풀릴 참이었다. 1954년 모친 김영선 씨가 서면시장에서 시작해 형제들의 지점으로 이어온 가게를 좀 더 키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박 씨는 범죄와의 전쟁 때문에 영영 장사를 접을 뻔했다. 야간 단속에 세 번째 걸렸을 때 택시기사 손님이 "영업활동이 아니라 공짜로 밥을 준 것"이라고 증언해주지 않았다면 체인은 커녕 기존 허가도 취소됐을 것이다.

그 해 'IMF 사태'가 터졌지만 경주박가국밥 체인점은 40여 개까지 늘어났다. 지금은 체인 사업을 접었지만 토곡점이 당시에 체인점 모델 점포로 연 곳이다. 큰 밑천이나 기술이 필요 없는 돼지국밥은 실직자들의 창업 아이템으로 인기가 있었다. 이 시기 <부산일보>에는 돼지국밥 식당 개업 소식이 줄을 이었다. 양산에 살던 김희숙(57) 씨도 남편의 실직 뒤에 1999년 장전놀이터 골목에 장가네돼지국밥을 열었다.

많은 돼지국밥 식당이 IMF 때를 호황기로 기억한다. 기장군이 부산에 편입되기 전인 1992년, 김차순(71) 씨가 기장시장 뒤편 허허벌판에서 시작한 조방국밥도 그랬다. 인근 공사장 인부와 시장 상인, 주머니 사정 가벼운 서민들에게 돼지국밥은 고마운 한 끼였다. 김 씨의 아들 양홍전(33) 씨는 어린 마음에 개업 다음날 가게에 불이 나서 마음을 졸였던 일, 차차 자리를 다지다 IMF 때 불황을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손님이 몰려들어 엄마가 한숨을 돌렸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부산의 확장과
돼지국밥 세대교체
부산은 놀거리 먹을거리 없는 척박한 도시에서 문화관광 도시로 차근차근 나아갔다.
본전돼지국밥 주성식(62) 씨는 2002년 초량동 가게를 접고 부산역 옆 골목길 점포에 웃돈을 얹어주고 들어왔다. 주 5일 근무제 도입을 앞두고 주말 장사는 포기해야 하는 사무실 상권 대신에 막 KTX가 개통한 역 앞이 유망하다고 봤다. 그 때 설렁탕집만 있던 골목은 이제 돼지국밥 골목이 됐고, 본전돼지국밥 앞에는 주말마다 외지 손님들이 여행 가방을 든 채로 줄을 선다.

합천일류돼지국밥도 2003년 개업하고 이듬해 구포역에 KTX가 정차하면서 인근 공단을 찾는 서울 출장객 손님들에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좌석과 24시간 영업 덕분에 야근을 마친 사상공단 노동자들이나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손님들에게는 이미 사랑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가게 경영에 나선 박지영(41) 씨는 반찬 셀프 코너, 덜어먹는 김치 항아리 같은 서비스도 남들보다 먼저 도입했다.

본전돼지국밥 앞 주성식씨(왼쪽) | 쌍둥이돼지국밥 앞 고맹연 김인철 부부(오른쪽).

돼지국밥을 즐기는 세대도 교체됐다. 이동주(66) 공문자(56) 씨 부부는 80년대 사무실이 밀집한 초량동에서 돼지국밥 식당을 했다. 그 때는 어쩌다 한번 오는 여자 손님을 위해 비빔밥 같은 별도 메뉴가 필수였다. 2012년 부부가 부평깡통시장에 다시 연 소문난돼지국밥에는 여성 관광객이 절반이다. 연령대도 예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젊은 사람들이 더 많다. 1996년 대학들이 밀집한 대연동에 개업한 쌍둥이돼지국밥은 깔끔한 맛과 넉넉한 인심으로 대학생들의 입맛을 먼저 사로잡았다. 지금은 국내를 넘어 동남아 여행객들도 들르는 관광명소가 됐다.

부산국제영화제도 전국구 젊은층을 돼지국밥의 세계로 인도하는 데 기여했다. 구남로가 논둑이던 1972년 해운대시장에서 개업한 형제전통돼지국밥은 이제 가을 영화제 기간이나 대학생들이 부산 여행을 오는 겨울방학이 여름보다 더 바쁘다. 민락수변공원의 수변최고돼지국밥은 광안대교나 불꽃축제를 보러온 관광객들의 허기를 채워준다. 양산왕돼지국밥은 센텀시티 완공으로 재송동 매장이 자리를 잡았고 2014년에는 동부산관광단지 내 롯데아울렛에도 입점했다.
3세대 청년 사장들의 이야기
노포들 다수는 3대 경영에 접어들었다.
조방 앞 합천식당 백지원(28) 씨는 이 중에서도 최연소에 속한다. 1대 창업주 김우자 씨가 60년대 후반에 합천식당을 열었고 1992년 같은 골목에 딸 김해영(50) 씨 가게를 하나 더 열어줬다. 이듬해 태어난 손녀가 백 씨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빠 차에 앉아서 엄마가 일을 마치길 기다리고는 했다. 엄마는 강인한 장사 체질이었다. 거래처 사람들과 싸우면서 재료를 골랐고 까다로운 단골들의 취향도 척척 맞췄다.

백 씨는 엄마가 막냇동생을 가지면서 스무 살부터 가게를 돕다가 5년 전 주방을 완전히 물려받았다. 엄마는 가게를 접으려고 했지만 백 씨가 해보겠다고 했다. 늘 보던 기사 아저씨며 시장 상인들 단골들이 하루아침에 식당이 없어지면 아쉬워할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늘 봐왔던 일이라 국물 맛을 내고 손님들의 입맛을 외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종일 서서 고기를 썰고 수십 번 토렴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몸이 아픈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유튜브 먹방을 찍으러 온 또래들을 보면 가게는 두고 나가서 놀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래도 백 씨는 전통 돼지국밥의 맛을 지키는 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평깡통시장 양산집 노치권(32) 씨는 2012년 미국 교환학생 유학을 목전에서 접고 3대 국밥집 사장이 됐다. 부모님 모두 투병 중인데다 가족의 생계수단인 가게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양산집은 외할머니 서말순 씨가 1967년 인수하고 간호사를 하던 어머니 강윤희 씨가 이어받은 가게였다. 어머니는 자식까지 장사꾼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당시 노 씨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걱정하는 누나들에게는 서른 살까지만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암에 이어 알츠하이머까지 찾아온 어머니에게 레시피를 물을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국밥의 맛을 원점에서 복기했고 밤이면 일식집에서 칼질을 배우고 쪽잠을 잔 뒤 다시 가게에 나왔다. 조기축구 하러 가는 길에 솥에 불을 붙이고 폭설이 온 날 구포시장에 고기를 받으러 갔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옛 레시피를 복원하고 가게도 보수했다. 옛 단골들이 돌아왔고 새로운 손님들도 생겼다. 하지만 이 모습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