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데우는 맛의 비밀
트렌치코트 차림의 젊은 서울 남자가 첫 기차를 타고 곧장 마산식당으로 왔다.
돼지국밥을 너무 먹고 싶어해서다. 영진돼지국밥에는 명절 때마다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고 오는 손님들이 여럿 있다. 부산의 돼지국밥 노포들에는 이런 사연이 수두룩하다.
‘잘 먹어야 본전’ 에서 솔푸드 되기까지
국에 밥을 말아먹는 탕반은 원래
한국 사람들의 솔푸드(soul food) 다.
탕반은 19세기 말 한글 요리서 〈규곤요람〉과 〈시의전서〉에도 등장한다.
김홍도의 풍속화 속 주막에서도 국밥을 판다. 그러나 돼지국밥은 문헌에서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기 하면 소고기였다. 돼지고기는 1970년대까지 ‘잘 먹어야 본전’이라고 했다. 짬밥으로 키우는 부업 양돈이 대부분이었고 소고기보다 쉽게 상해 식중독 사고도 잦았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단원 김홍도 <주막>.
18세기 후반. 국밥을 먹는 남자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됐다.
〈대한민국 돼지산업사〉에 따르면 70년대 돈육의 일본 수출을 계기로 이런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양돈업이 산업화되고 사료 사육이 정착되면서 맛이 관리되고 특유의 냄새가 줄었다. 돼지고기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80년대 삼겹살 로스구이의 유행이 시작된다.
https://youtu.be/doynreC1a3s
부산에는 이보다 앞서 돼지국밥이 등장했다. 위 책의 공저자인 김태경 식육마케터는 “60년대 홍콩에 산 돼지를 수출할 때부터 부산항에 전국 돼지가 모였고, 70년대 들어 일본에 정육 형태로 수출하고 남은 부산물과 뼈 유통이 활성화된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유추했다.
처음 부산돼지국밥은 시장 상인과 육체 노동자들의 패스트푸드였다. 그러다 도심으로 진출하면서 사무실 노동자나 배고픈 학생에게도 대중적인 외식이 됐다. 올 6월 기준 부산의 ‘돼지국밥’ 상호 식당만 해도 692곳. 부산 면적으로 단순히 나누면 1.1㎢당 1곳이 있는 셈이다.
부산에는 골목마다 돼지국밥 식당이 있다
돼지국밥이 학교급식의 고정 메뉴라는 점은 부산에서 돼지국밥의 대중성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부산시교육청 송진선 장학사에 따르면 돼지국밥은 학교급식이 도입될 때부터 한두 달에 한 번은 꼭 식단에 포함됐다. 가마솥에 대량으로 끓일 수 있어 급식으로 적합했고 학생들의 선호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맛과 영양 고루 갖춘 한 끼의 행복
돼지국밥의 위안은 영양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다. 2007년 김상애 당시 신라대 교수는 부산시 향토음식 지정을 위한 연구에서 식당 9곳의 돼지국밥을 분석했다. 따로국밥 1인분의 평균 열량은 국(612g) 280kcal, 밥(140g) 200kcal로, 반찬까지 하면 한끼 500kcal 정도였다.
같은 분석에서 공깃밥을 뺀 돼지국밥의 성분은 수분(92.54%)을 제외하면 단백질이 2.28%, 지방이 3.46%였다. 돼지국밥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에는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 지방산 중에는 건강한 불포화지방산인 올레인산 함량이 높다. 고기의 풍미를 결정하는 성분들이다. 돼지국밥에 주로 쓰는 앞다리살, 목살은 삼겹살에 비해 고단백 저지방 다이어트 부위이기도 하다.
“돼지국밥은 열량이 높지 않으면서 수육의 단백질, 육수의 칼슘, 밥의 탄수화물, 반찬의 비타민과 무기질까지 5가지 기초식품군을 고루 갖춘 영양균형식이다.” 돼지국밥의 영양소 분석 연구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문숙희 경남정보대 식품영양과 교수에 따르면 특히 돼지고기는 비타민 B1 함량이 소고기의 10배 정도 많다. 비타민 B1은 피로감 해소와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상차림의 궁합도 훌륭하다. 비타민 B1은 마늘과 부추, 양파의 매운맛 성분인 알리신과 결합하면 체내 흡수가 더 잘되고 활력을 높인다. 새우젓에는 단백질 분해효소인 프로테아제와 지방분해효소 리파아제가 많아 돼지고기의 소화를 돕는다.
각자의 추억이 뇌과학을 만날 때
많은 부산 사람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돼지국밥에서 지친 하루를 위로받고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뇌과학 연구에서는 솔푸드의 형성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음식의 맛을 혀의 미각세포로 처음 받아들이지만 맛을 분류하고 느끼는 것은 피질 뇌세포다. 이것은 다시 뇌 속 깊숙이 있는 작은 기관 편도체에 이르러 음식을 맛본 상황과 감정을 종합해 ‘가치’로 판단하게 된다.
돼지국밥이라는 음식 자체보다 특정한 단골 식당의 음식을 솔푸드로 꼽는 사람이 많은 것도 흥미롭다.
경주박가국밥 박주호(64) 씨는 이를 “인이 박인다”고 표현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한 번 오면 평생 오게 되고 고향을 떠나도 연어처럼 그 맛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단골 식당의 맞춤 ‘대접’도 각인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여러 돼지국밥 식당은 단골 손님에 따라 좋아하는 고기 부위, 양념이나 곁들이 반찬의 종류를 기억했다가 내놓는다. 학생에게 양을 더 주거나 서비스를 얹어 주는 인심이 살아 있는 곳도 많다.
쌍둥이돼지국밥 고맹연(57) 씨는 “특히 혼자 오는 손님은 대화 없이 음식에 집중할 테니 먼저 다가가서 부족한 것을 챙겨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부산돼지국밥의 대명사가 된 쌍둥이돼지국밥의 시작은 배고픈 대학생들을 따뜻하게 챙기는 마음이었다.
양산왕돼지국밥 이태수(58) 씨는 다른 사업을 하다가 어머니가 양산에서 하던 돼지국밥 식당을 부산에서 시작했다. 이 씨는 “학생들이 오면 음료수라도 더 챙겨 주는데 이렇게 식사를 ‘대접’하는 기쁨은 다른 사업에서는 잘 얻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